국제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발달 해 온 무서운 치과 치료에 관한 역사

o2zone 2018. 2. 8. 21:38

치과 의사가 등장하기 전에는, 충치 치료는 어떻게 했었을까? 


충치의 고통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을 괴롭혀 온 것이다. 치아 통증은, 견딜 수 있는 통증 중에서 가장 비참한 고통 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행히 현대의 우리들은, 오랜 세월 축적 해 온 종합적인 지식과 현대의 의학 기술 덕분에 통증도 거의 없고 건강한 치아를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에게는 매우 누릴 수 없는 사치였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국소 마취와 강력한 진통제가 사용되기 전에는, 몇 명의 도움을 받아 사람을 꼼짝 못하게 붙잡고, 조잡한 도구로 억지로 입을 비틀고, 의사는 펜치로 강제로 이를 뽑기도.... 


그 잔혹함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말 것이다....그런 무서운 옛 치과 치료의 역사를 몇가지 살펴보면. 



■ 치과 치료의 탄생은 고대 이집트에서 


기록에 따르면, 치과 치료는, 암울한 시대...식사 사정도 어려웠던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식단은 주로 곡물이었지만, 안전한 빵을 만드는데 오늘처럼 제대로 살균 된 질 좋은 재료와 좋은 가정 용품도 없었다. 따라서 다양한 금속 광물 중 몸에 나쁜 것들이 빵 속에 들어가 충치 등 많은 치아 장애를 일으켰다. 




이집트 인들은 음식에서 모래를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었고, 이것은 당시 만연하고 있던 입안의 건강 문제의 원인이 되고있었다. 


세계 최고의 치과 기록은 기원전 266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조세르 왕의 수석 치과로 내과의사였던 Hesyre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대의 주요 치과 치료는, 충치이거나, 빠지거나, 깨진 치아와 잇몸이나 고름 상처에 통증을 완화하는 충전재를 하는 것이었다.


충전재의 재료는 벌꿀과 허브 등 식물, 돈 문제도 있었지만, 돈을 충전재로 사용한 치과 치료가 사후에 행해진 것인지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시대에 행해진 치료는 끔찍하고 참을 수 없는 통증을 수반 한 것은 확실 할 것이다.



■ 치아에 구멍을 뚫고, 복잡한 치료이 시작


당시, 철저한 수술이 이루어졌는지 여부, 발치가 이루어졌는지 여부는 남아있는 증거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같은 초기부터 보철(틀니)가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케이스가 3가지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처음으로 금니를 썼다. 구멍을 뚫어 골드 와이어로 복잡한 스타일을 만들어 내고있었다. 아마 이를 합당한 위치에 고정하기 위해 또는 미용이었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2500년에는, 오늘날에는 악몽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첫 번째 치료가 시행되었다. 바로 치아에 구멍을 뚫는 것이다. 고름을 내 종양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구멍을 뚫은것 같은데.... 현대 의학의 혜택도 없는 시대에 이러한 조치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 에트루리아 인에 의한 치과 기술의 발전


에트루리아 인은, 로마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탈리아 토착 민족으로, 기원전 700년에서 400년경 살았던 사람들이다. 기원전 700년까지는 에트루리아 인은 이미 동물의 이빨이나 금 충전재를 사용하여 임플란트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금속을 따뜻하게 납땜하여 노출 된 신경이나 충치를 채우고 음식 찌꺼기 등에 노출되는 펄프 및 말단 신경의 통증을 억제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에트루리아 인은 동물의 치아와 뼈를 사용하여 세계 최초의 심미 치과 치료를 실시했다. 그들의 틀니는 현재의 것 일수록 내구성은 없었지만, 쉽게 설치해 교환이 가능하며, 이 방법은 1800년까지 계속되었다.



■ 고대 그리스에서 치과가 부진했던 이유


고대 그리스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발전해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치과 치료에 관해서는 뒤쳐져 있었다. 이것은 주로 그들의 철학과 호전적인 성격에 기인 한 바가 크다.


그리스인들은 힘과 아름다움이 최고의 미덕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충치의 통증 등 치아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지불 대가로 작은 것이었다. 통증은 약점의 증거로, 의사가 치아를 뽑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확실히 사회적 지위를 잃을 정도의 데미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치통으로 고생 한 사람들이 원했던 가장 좋은 방법은, 다양한 약초를 적셔 치아에 채워 음식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정도였다. 게다가 충치를 뽑지 않은 탓에 많은 사람들이 감염으로 죽었다. 대부분의 경우, 치통 지옥의 고통을 없애달라고 소원하며 빌기만 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잘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는 것.



■ 화이트닝의 탄생


중세 문화는 화이트닝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화사함의 하얀 치아를 위해 많은 조합 약물이 만들어졌고, 판매되었고, 실제로 사용된 것은 현대 치과 의원에서 동일하게 선전하고 있는 제품들과 거의 똑같다.


여성은 식사 후에 훌륭한 와인으로 입을 충분히 씻어낸다. 그리고 잘 말린 새 하얀 천으로 이를 닦는다. 마무리로 매일 회향 또는 미나리, 파슬리를 씹으면 입안이 상쾌하게 되고, 잇몸도 청소, 치아가 하얗게된다.



■ 틀니의 탄생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예방 및 발치뿐만으로는 치과 치료는 따라 잡지 못하게 되었다. 세계 무역의 확대에 따라 설탕은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어, 일반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빈곤층은 여전히 영양 실조가 만연하고 있었고, 치아와 뼈의 문제를 일으켰다.


치아의 교환은 에트루리아 인 이래 주류였기 때문에, 전체 브리지나 틀니 치과의 역사에서 피할 수없는 것이 되어갔다. 14~15세기까지 치과 의사는 브리지나 의치가있는 미용 외과 의사가 되어 있었다.


소뼈를 치아의 형상대로 성형하고 그것을 틀니가 필요한 가난한 환자의 입에 끼워 금 와이어로 고정. 의치가 느슨해진 경우에는 다시 금 와이어를 갈아 끼워준다.



■ 죽은 사람으로부터 틀니를 만들기


당시 틀니로 사용할 재료라고 하면, 죽은 사람의 치아였다. 중세 사람들은 자주 시체에서 치아를 뺐다. 중세 시대에는 시체는 충분히 있었던 것이다.


여러 시신에서 치아를 뽑아, 환자의 치아에 맞는 틀니를 만드는 것으로 보다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 확실히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고는해도 좀 무섭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