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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전투의 역사, 마차와 기병 그리고 전차

o2zone 2017. 10. 19. 10:14

예로부터 전장에서의 이동 속도는 화력이나 방어력과 더불어, 때로는 그들을 능가하는 가치를 가진 중요한 요소였다. 우선 단순히 속도를 편승한 일격은 그 위력을 크게 늘리고 있으며, 고속으로 움직이는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데에도 어렵다.


또한 집단 전투에서 진형은 거의 반드시 약한면과 약한 방향을 가지기 때문에, 그러한 측면, 후면에 전력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면, 정면으로 치는것 보다 큰 타격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속도가 우세하다는 것은, 이길 때 공격, 불리할 때에는 물러난다라고 하는 이니셔티브를 스스로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이동 속도라는 것은 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 구조상 아무리 단련해도 주력에는 한계가 있고, 무거운 무기 방어도구를 착용 한 채 달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는 지역에서는 그것을 이용하여 군인의 이동력을 크게 끌어 올렸던 병사는 아마도 유목민의 기병이었을 것이라고 추측.




그러나 이 연대(기원전 3000년경)의 승마라는 것은, 아직 말에대한 최소한의 쿠션 등으로 기승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동만 한다면 몰라도 말에 타고서 전투를 해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승마에 익숙한 유목 민족, 그 중에서도 특히 기량이 뛰어난 전사가 기병으로 싸울 수 있다는 정도였던 것이다.



병종으로 확립되었던 것이 아니라, 상세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추측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다는 것. 그런데 명확하게 기록에 남아있는 병종으로서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2500년경 메소포타미아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을 직접 타고 싸우는 기병이 아니라 이륜 마차를 끌게하고, 거기에 타고 싸우는 "전차병"이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로 알려진 우륵 등을 중심으로 문명이 태어난 지역은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퇴적 영역으로 널리 평평한 지형이 펼쳐져 있었다.


인구를 지탱하는 주요 산업은 말 재배로, 그것을 각자 수출하고 특산품을 얻어 사요했다는 농경 민족이며, 태어날 때부터 승마에 익숙해 져 있었다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그래서 말을 타고 싸울 수 없는 인간들은, 기동력을 원했었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전차병이었던 것.


덧붙여서, 이 시대의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말이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고, 당나귀가 그 역할을 했었다고 하니 상당히 힘이 들었을 것이다.



이 "전차"는 이륜 또는 사륜이기도 한 마차를 끌게 한 다음, 거기에 전투를 담당하는 병사를 태우고 행동을 개시했다. 당시의 기술로는 말을 제어하면서 무기를 취급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었기 때문에, 무기를 담당하는 병사를 따로 태웠을 것이라는....당연히 말을 끄는 사람은 말을 조종.


동력은 순전히 말로서, 구조상 선회성이 상당히 떨어져 직접 말을 타고 달리는 것보다 상당히 효율이 나빴고, 단자와 장애물에도 약했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기동력은 기병에 비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기병이 아직 나오지 않았던 시대에 사람의 달리기 능력의 몇 배의 속도로 이동하면서 공격 가능했던 전차는 매우 유력한 전력으로 보탬이 확실히 되었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보병의 대열에 화살을 계속 발사. 대열이 무너진 곳이 있으면 돌격 해 더욱 혼란시키고, 또한 적의 전차의 요격을 가하는 등 그 역할은 작지 않았다.




덧붙여서, 전차가 사용 된 것은 여기 메소포타미아인뿐만은 아니었고, 고대 이집트, 인도, 그리고 고대 중국에서도 중요한 전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 관해서는 춘추 시대(기원전 700~400년)가 주요 활동 연대였다.


어쨌든 공통점은 농경 민족이었으며, 넓은 평탄지가 많은 지역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활약한 전차였지만, 기병에 비해 성능면뿐만 아니라 비용면에서도 큰 문제가 있었다. 먼저 하나의 단위에 매우 비싼 유지비가 들었고, 말을 2~4마리나 사용한다는 것. 또한 전차 자체가 당시의 공업력으로서도 꽤 "무거운" 산물이며, 생산에 유지 보수에도 많은 비용이 걸린 것.



더구나 전차병은 귀족이나 그에 가까운 유력자 자제가 맡는 경우가 많았고, 운영하는데에도 상당한 수당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삼중고가 걸려있었다.


세 번째에 관해서는, 사회 체제적인 문제인데, 처음 두 전차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단점이다.


그런데 전차가 평야의 대 문명에서 주연을 맡고있는 동안 직접 말에 타고 싸우는 "기병"이 조용히 발전해 나갔다. 그 중 최고로 발전하게 된 계기는....바로 말 안장과 등자 세트가 완성 된 것.


이러한 안장과 등자 세트로 인해 실용 수준의 승마 전투 기술을 점점 익혀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되어, 원래 성능면에서나 비용면에서도 뒤지고 있던 전차는 그 지위를 기병대에 양도하게 되는 것이었다. 서양에서는 전차가 쓸모없게 된 후 중장 보병, 팔랑크스의 시대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기병으로의 전환은 명확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단지, 고대 그리스 시절에 이미 실용 무기로 간주되지 않고, 로마 시대가되면서 완전히 과거의 유물로.


오히려 로마에서는 전차 경주의 형태로 스포츠 화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제2차 포에니 전투에서 한니발이 누미디아 기병대를 종횡으로 잘 다루어 뛰어난 전술을 성공시켰으며, 기병이라는 것의 유효성이 다시 발견된다.


단, 등자가 늦게 전해졌던 유럽 지중해 세계에서는 7세기 경이 되어 중장기병의 "기사"라는 형태로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동양에서는 그것보다 훨씬 빨리 기병의 시대에 돌입했었다.


우선, 흉노 등의 유목 민족과 접하고 중화 세계는 그 효과에 주목하고 적극적으로 유목 민족의 기병대를 모집한다. 또한 그 흉노의 습격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이 필요하며, 비용이 늘어나도 기병 부대를 정돈 해 나갔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병에 그 자리를 넘겨주었던 전차였지만, 중세 말기 15세기 후스 전쟁에서 "전투 마차"라는 형태로 느닷없이 부활한다.


기동 전력이리가 보다는 이동 가능한 대포 요소로 운용 된 "전차"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으로 후스 전쟁 후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또한 시대가 진행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 중 "싸우기 위한 차량"은 "전차(Tank)"로 부활하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