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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에 협력한 유럽 부역단체들

o2zone 2017. 5. 11. 15:56

저항하지 않고, 나치에 협력 한 유럽 사람들...우리로 말하면 친일단체라고나 할까?


영화나 소설은 물론, 역사책에 이르기까지 그런 상황이 주류로, 실제 저항 운동도 심했다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나치 독일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유럽을 석권하여 지배를 강화 해 나가는 가운데, 점령 당한 국가중에는 나치 지배에 협력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다.


어느 시대, 장소에도 "세상살이에 능숙"한 사람은 있으니까.... 그런 나치 지배하에 나치에 협력한 단체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1. 독일 플랜더스 노동 집단(벨기에)


친 독일 활동의 공을 경쟁한 "문화 집단"


독일 플랜더스 노동 집단(Devlag : Deutsch-Vlamische Arbeitsgemeinschaf)는 1936년에 벨기에 플랑드르의 극우 정치인 제프 밴드 휠에 의해 설립 된 단체. 처음에는 루벤 대학과 쾰른 대학의 교수와 학생의 교류 촉진이 목적이었다.


1941년에 플랑드르가 독일에 점령되었고, Devlag는 나치 독일 친위대(SS)에 의해 조직 개편되었고, 가로프 베르거가 대표로 취임했다.


당시 플랑드르는 Devlag 외에 플랑드르 내셔널 유니온(VNV)라는 플랑드르 독립파의 나치 조직이 있었고, SS는 플랑드르 지배 주도권을 어느쪽으로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Devlag는 주로 친 독일적 "문화 활동"이 주요 활동이었지만, 라이벌 VNV 못지않게 모집 활동을 활발히하여 유스 조직을 만들고, 자신쪽이 나치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려고 앴다. 1943년에는 회원이 5만명에 달했었다.


SS는 그 공을 인정하여 Devlag를 플랑드르 지배의 중심에 놓으려고 했지만, 이미 연합국의 반전 공세는 시작되었고, 곧 벨기에는 해방되어 Devlag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2. 덴마크 자유단(덴마크)


독일의 소련 침공에 협력 한 덴마크 인 부대.


1940년 4월에 덴마크는 독일 지배하에 들어가지만, 같은 해 6월에 시작된 독일에 의한 소련 침공 작전에 있어 독일 정부는 덴마크 정부에 부대를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그 7일 후, 덴마크의 친 독일파 Faedrelandet 지는, "덴마크 자유단(Free Corps Denmark)" 결성을 게재하고 동시에 대원 모집을 호소했다.


가입하면 원래 계급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덴마크 군의 대원 약 6000명과 지휘관 77명이 참가.


한 달 뒤인 7월에는 함부르크에 보내져, 교육을 받고 9월부터 폴란드에서 대기하고, 이듬해 5월에는 데먄 스크와 노브 고로드의 전선으로 보내져 소련군과 싸움을 했다.


그런데 피해는 심대했고, 지휘관들이 속속 전사. 8월에 부대는 전선 임무에서 해방되어 덴마크로 귀환했다. 그 부대는 라트비아, 이어 뉘른베르크로 전전, 1943년 6월에 해산되었다. 회원은 HIPO Corps와 Schalburg Corps와 같은 덴마크 인 부대에 합류시켜 종전까지 독일과 함께 싸웠다.


3. 반공 프랑스 의용군단(프랑스)


"샤를 마뉴 군단"의 전신 조직.


반공 프랑스 의용군 단(LVF : Legion des volontaires francais)는 비시 정권 하의 1941년에 새로운 독일 파의 프랑스 정치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 한 군대로 나치 독일의 침공에 적극 협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회원은 프랑스 인의 나치당 멤버와 프랑스 외인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러시아인 대원으로 돈이 목적이거나 독일의 노동을 피하고 싶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4. 그리스 사회주의 애국단체(그리스)


도중에 좌절된 그리스판 SS 설립의 꿈.


그리스 사회주의 애국 단체(ESPO : Hellenic Sociallist Patriotic Organization)는 1941년 여름에 스바이로스 스테로디마스 박사에 의해 설립 된 친 독일조직으로, 구성원은 초 국가 주의자와 나치 추종자로 이데올로기로서 반공 반유대를 내걸었다.


활동은 주로 유대인 사냥과 회당의 단속으로, 스테로디마스 박사는 단체를 그리스 버전의 SS(무장 친위대)로 길러, 독일에게 자신들의 존재와 활동을 어필하여 인정 받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박사와 28명의 대원은 반 나치 저항 조직, 범 그리스 무장 연합 청년부(PEAN)에게 테러를 당해 사망. 지도자를 잃은 ESPO도 곧 사라져 버렸다.


5. 아라쟈스 코만도(라트비아)


라트비아 홀로 코스트의 주체가 된 조직.


아라쟈스 코만도는 1941년에 SS가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라트비아 인이 주체가 된 조직. 회원의 대부분은 나치 사상의 소유자 또는 젊은 학생이었다. 설립 당초는 어디까지나 자원 봉사 단체로 회원 가입과 탈퇴도 자유였다.


그들의 임무는 나치 독일이 제창하는 "열등 민족의 근절"을 실천함으로써 유대인과 집시, 공산주의 자의 살해를 주도했다. 소련 국경 부근에서의 유대인 학살 임무 외에 독일에서 보내져 온 수천 단위의 유대인을 리가 근교의 빈민가에 수용시켜 처형하는 임무도 맡았었다. 약 26,000명의 유대인이 아라쟈스 부대에 의해 살해 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시는 300~500명의 대원으로 조직되어 있었지만, 라트비아 국내에서 빨치산 활동이 활발해지자 그 단속을 위한 채용 활동에 주력, 약 1500명으로 증가되었다.




라트비아가 소련에 의해 점령되자, 일부 멤버는 라트비아 판 SS의 "라트비아 부대"로 이동하여 베를린 함락까지 싸웠다고 전해진다.


6. 리투아니아 영토 수비대(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영토 수비대(LVR : Lietuvos vietine rinktine)는 1943년에 설립 된 리투아니아 인 주체의 국방 조직이다. 독일 점령하의 리투아니아에서 동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비에트 적군으로부터 국토를 지키는 것은 초미의 과제였다.


또한 국내에서는 공산주의 게일라와 폴란드 빨치산이 침입해 치안을 어지럽히고 있었으며, 리투아니아 인 자신에 의한 국토 방위와 치안 유지의 필요성이 주장되고 있었다.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의 영웅 보퓌라스 푸레뷔우스 장군은 독일과 협력하여 LVR을 설치. 당초 독일측에서 허락된 계획은 21군단과 250명의 멤버였지만, 리투아니아의 지하 정치 조직은 빠짐없이 LVR을 지지하고 협력, 1944년 리투아니아 독립 기념일에 푸레뷔우스 장군이 라디오 방송에서 유시를 모집했는데, 응모자가 쇄도 2만 ~ 3만명으로 증가.


나치는 단기간에 너무 많이 증가된 LVR에 불신감이 더해졌고, 어디까지나 독일 휘하에 있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선서식에서 히틀러와 SS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하거나, 너무 힘을 가지지 못하게 무기 및 제복 배급을 잘 해주지 않았다.


1944년 3월, 독일은 갑자기 LVR의 해산을 명령했고, 지휘관을 체포하고 처형. 부하들은 나치가 조직 한 대소 무장 조직에 편입을 명령했지만, 잔당들은 리투아니아 인 게릴라 조직 "포레스트 브라더스" 등 다른 반소 조직에 가입하게 되었다.


7. 영국 자유군단(영국)


나치를 좋아하는 영국인이 만든 "영국인 군단"


영국 자유 군단(British Free Corps)는 영국인 포로에 의해 구성된 부대로, 설립한 것은 존 아멜리라는 인물이다. 원래 반공 주의자로 나치에 심취했던 아멜리는, 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히틀러에게 "영국인에 의한 반공 의용 부대"의 설립을 타진. 이에 감동 한 히틀러는 아멜리에게 협력을 약속 했다. "영국인에 의한 독일군 부대"의 설립을 지시했다.


이에 분발 한 아멜리는 영국 국내에서 부대 설립에 분주했지만, 스파이가 본국에서 체포되기도 해 좀처럼 일이 잘되지 않았고, 결국 영국인 포로 중에서 "처우 개선"을 미끼로 대원을 모집해 겨우 14명의 지원병이 추가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대원을 모집했지만, 정신적으로 이상한 사람과 규율 위반으로 원래 영국인 부대로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 영국인에 의한 차별에 반발 한 사람등 어떤 문제를 가진 사람들 뿐이었다. 당초 아멜리가 상정 한 "반공 정신에 불타는 영국인"은 거의 모이지 않았다.


1945년 부대는 동부 전선의 일부 부대 노루토란토 사단의 일부로 배치되었지만, 죽을 쑤어 살아남은 영국인 대원들은 전부 미군에 투항.


종전 후 부대를 창설 했었던 아멜리는 바로 처형되었다.


8. 히뷔(소련)


자발적으로 독일군에 협력 한 사람의 총칭.


히뷔는 일반적으로 나치에 협력 한 적국의 민간인과 탈주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독일어의 Hilfswillige(자발적 협력자)의 약어. 특히 러시아와 소련 영내에서 도망자로 많은 히뷔라고말하면 "러시아인 협력자"와 결부되어 말할 경우가 많다.


히뷔에는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가 "전투 부대"에서 독일군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 자로, 독일군의 코사크 부대로 구성된다. 두 번째가 "보조 부대"로 정찰이나 보급 임무를 맡은 사람으로, 점령 지역의 사람들과 죄수. 세 번째가 "잡일 부대"로 청소나 요리 등의 육체 노동에 임한 사람으로 주로 죄수가 많았던 것 같다.


히뷔의 러시아 인 부대는 독일군 제6군의 일원으로서 스탈린 그라드 전투와 남방 전선(우크라이나 루마니아)의 싸움으로 대략 5만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전후 많은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전쟁 중에 히뷔를 하고 있었던 것이 발각되어 체포되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