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8세기 프랑스에서 단발머리가 유행한 이유

o2zone 2020. 4. 17. 15:15

18세기 이전, 프랑스의 여성은 긴 머리가 주류였다. 그것이 18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짧은 단발 머리의 여성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랑스 혁명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던 18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이해하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 키워드는 고대 로마 귀족과 단두대 처형이다.



■ 고대 로마 귀족과 18세기 프랑스의 단발 머리와의 관련성


프랑스 혁명 후기, 상류, 중류 계급의 젊고 세련된 남녀가 일제히 머리를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티투스 컷"이라 불렸고, 상당히 유행했다. 티투스는 기원전 509년, 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 로마를 설립 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장남 티투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이다.




고대 로마의 귀족과 18세기 후반의 프랑스의 짧은 헤어 스타일....보기에는 아무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이 관계는, 1729년에 시작되었다.



■ 프랑스 혁명때 대히트 한 고대 로마의 연극


1729년이라는 해는, 프랑스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가, 5막의 연극 "브루투스"을 완성시켰던 해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 티투스를 죽게 한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전설을 바탕으로하고있다.


티투스는, 군주제를 부활시켜, 추방 되었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스펠브스 왕을 복귀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해서 처형되었다. 티투스가 스펠브스 왕의 딸에게 반하여 이용되어져, 공화제 로마를 배신한 음모의 주동자로 끌려간것.


원로원에 붙잡혀있던 티투스가 아버지에게로 인도되었을 때, 브루투스는 아들을 용서했지만, 공화국의 안정을 공고히하기 위해 아들의 처형을 주장했다.


이 "브루투스"는, 볼테르의 히트되지 않았던 연극의 하나였다. 초연은 1730년이었지만, 종래의 비극으로서의 연극 이론이 이해되지 않았고, 브루투스의 성격묘사가 너무 심하다는 혹평으로, 단 15회 공연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근거로 다시 상연되었는데...이번에는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는.



1790년 11월 17일, 파리의 코메디 프랑세즈에서의 첫날, 브루투스 역의 배우가 "신이시여! 예속보다 죽음을 주소서!"라고 외쳤을 때, 극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1791년 5월 30일, 볼테르의 13회기의 날, "브루투스"는 왕립 국립 극장과, 라이벌 극장 인 테아토르 드랄레퓨브릭에게 상연되었다.




티투스 역의 배우, 프란시스 조셉처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고대 로마풍의 의상으로 연기했다. 그 며칠 후, 파리를 가로 지르는 젊은이들이 "티투스 풍"의 단발 머리를 흉내 낸 것이다.


■ 단두대에 의한 처형자의 삭발 영향도


이 짧은 머리는, 프랑스 혁명과 또 다른 점에서 관계가 있다. 단두대의 칼날이다.


수천명의 사람을 처형 한 공포 정치 후, 이상하게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단두대에 걸린 참혹한 희생자를 가장한 패션이 유행했다.



실제 피해자들은, 처형 전에 집행인으로부터 머리를 짧게 깎여졌다. 단두대의 칼날이 한방에 확실하게 잘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것을 흉내내고, 짧은 머리, 빨간 리본을 목에 감고, 목이 절단 된 "표시"로 했다는. 많은 상류층이 "피해자의 무도회"라고 칭했던 파티를 주최하고 기존의 지재 체재가 끝난 것을 축하했다.


파티 참석자들은, 일부러 허름한 드레스와 샌들이나 맨발 같은 모습으로 죽어가는 불쌍한 희생자가되어 파티에 참석했다. 맨발은 단두대를 향한 여성들이 맨발 이었음을 암시하고있다.


그러나 역사가에 의하면, 당시의 증거가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무도회가 실제로 열렸었는지 여부는 의문이라고한다. 티투스 컷의 인기에 따라, 이 새로운 헤어 스타일은 다양한 방면에서 지지되었고, 점차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