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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었던 혁명 Top 10

o2zone 2017. 12. 23. 06:43

혁명....

혁명이라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요? 


가장 최근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한다면, 2011년 이집트에서 독재를 하고있던 무바라크 대통령이 대규모 시위에 의해 사임 한 이집트 혁명이 있었다.


혁명이란 광의로는 근본적인 사회 변혁이 일어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지배 권력이 하층 계급에게 전복되는 것을 말한다는. 왕이나 귀족이 자산가 시민(부르주아)에게, 부르주아가 평민(일반시민)에게 더 나아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에 권력을 빼앗긴다라는. 


혁명과 비슷한 말로 쿠데타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투쟁보다는 간단하게 권력자가 바뀌는 것으로, 반드시 계급 투쟁은 아니라고해야... 그래서 516은 혁명이 아니고 쿠데타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어쨌든 지구 역사상 가장 위대했고 영향력 있었던 혁명 Top 10을 살펴보자.


10 : 아이티 혁명(1761년~1804년)


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에 노예로 데려왔던 흑인들의 반란으로 가장 성공적인 것, 혁명이다. 이에따라 아이티에서 사상 처음으로 흑인에 의한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당시 아이티는 세계 설탕의 40%를 충당하는 생산지였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이티는 기이하게도 본국의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ㅂ다지 않고, 흑인 지도자 투생루 베르튀르와 그를 끌어들인 장 자크드 살린들의 선동에 의해 프랑스에서 독립을 달성. 또한 이후 미국의 흑인 노예에 의한 반란을 준비했다고 할 수 있다.



9. 이란 혁명(1972년 2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전개되고 있던 가운데, 이란은 지리적 자원적 이유로, 국제 전략에서 미국의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그것은 탈 이슬람의 근대화 정책을 내건 정보였다. 탄압되어 오던 이슬람 세력은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종교와 혁명의 지도자 이맘 호메이니를 정신적 지주로 혁명을 성공시켰다. 우리나라와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의 지역에서 냉전의 미소의 대리 전쟁이 벌어진 것과는 달리, 반미를 내세우면서도 이란은 소련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세계로 이슬람 세력의 자립을 세계에 알렸다고 할 수 있다.



8. 쿠바 혁명(1953년~1959년)


유명한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 등이 중심이되어,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정권을 타도 한 무장 투쟁. 소수로 부터 시작된 장렬한 게릴라전으로 승리를 쟁취 한 것, 아르헨티나의 의대생이었던 영웅 체 게바라가 혁명군에 목숨을 건 것으로 후에 전설이 된다. 원래는 공산주의 혁명은 아니었지만, 미국의 끊임없는 경계로 인해 소련에 점점 접근하게 된다. 미국과 지척에 있는 국가로서의 공산주의 국가의 성립은 세계를 놀라게하는데에는 충분했다.





7. 1911년 신해 혁명에서부터 국공 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 성립


영국과의 아편 전쟁, 일본과의 청일전쟁에서 대패 한 것으로, 열강에 대한 두려움이 더해가는 가운데,  시 정부 "청나라"에 대해, 손문 등을 중심으로 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참고 한 현대화를 목표로 한 세력이 청나라의 타도를 달성, 중화 민국이 성립된다.


그 후, 중화 민국 총통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과 마오 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은 내전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중일 전쟁 동안 국공 합작으로 협력.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당은 미국의 지원이 삭감 된 국민당을 따돌리고 중화 인민 공화국이 설립. 



6. 청년 투르크 당 혁명(1908년)


오스만 제국 말기에 압둘 하미트 2세에 청년 장교들이 헌정을 목표로하고 반란 한 혁명.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헌정의 확립에 의한 것으로 이 혁명에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제1차 대전 이후 터키 독립 혁명에 결실을 이루었다. 그 다음 터키의 근대화도 청년 투르크 당이 견인해 나갔다. 역사적으로 매우 영향력 있는 이슬람교의 계율을 정치 이로부터 분리 근대 국가가 되었다. 청년 튀르크라는 명칭은 그들이 망명해 있던 프랑스 "청년 이탈리아 당" 등 정치 결사에서 비유되었다.



5. 태평 천국의 난(1850년~1863년)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내전 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0만 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홍수전이 "태평 천국"을 건국하고 청나라와 13년에 걸친 처절한 내전을 벌였다. 당시 일본이 내전을 한족에 의한 타도 청(타도 만주족)의 내란이라고 파악하고, 설마 한족 출신이 아닌 홍수전에 의한 그리스도의 반란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었다. 태평 천국군은 규율을 준수하고,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확대해 나갔다. 또한 서유럽에서의 후원도 더해져 청조 타도 일보직전까지 몰아갔다.


그러나 홍수전은 청조를 멸망시킨 후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서구 열강은 청나라 측의 지원으로 서서히 기울어져 갔다. 홍수전이 당시 세계의 역학 관계와 중국의 현황을 잘 파악했다면, 중국에는 기독교 국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4. 러시아 혁명(1917년~1922년)


지금까지 300년에 걸쳐 러시아를 통일했던 로마노프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했다. 이전 1905년 로마노프 왕조의 폭정은 타도되었고, 국회가 열린 헌법 제정이 발표되어 있었지만, 결국 이월 혁명에 의해 완전히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하게되었다. 공화제가 확립되고 나서 이번은 정당 간의 싸움이 펼쳐진다. 분열 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 좌파의 볼셰비키와 우파였던 멘세비키의 싸움이...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평등을 내거는 혁명 사상, 사회주의(공산주의, 마르크스)의 세계적인 융성이 있었다. 당초 그 중심은 독일 사회 민주당이었지만,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사상이 전환되었기 때문에, 권위가 실추 그 지위는 러시아 볼셰비키가 계승. 러시아는 사회주의로서 성지가 되었다. 볼셰비키는 10월 혁명에서, 멘세비키를 쓰러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체제 국가가 설립되었다.





3. 미국 독립 혁명(미국 독립 전쟁 1775~1783년)


원래 같은 영국 국민이었던 것으로부터, 해외에서 싸운 영국 내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1620년부터 영국에서 이단으로 한 기독교 개신교(청교도)가 미국에 정착하기 시작.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국가들도 속속 정착을 시작했다. 독립 전쟁 당시 중서부에서 서쪽으로 미개척 동해안 만의 정착에 머물러 있었다. 그중 영국 식민지의 13주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영국 본국에서 가혹한 세금 부담이 발단이 되었었다.


전쟁이 발발하면서, 군사력으로 훨씬 능가한 영국군이었지만, 영국 본국으로부터의 거리가 멀어 고전했다. 그러나 독립군의 승리의 가장 큰 요인은, 프랑스 군과 스페인 군이 뒷받침 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승리는 프랑스 왕국을 기쁘게하지만, 적극적으로 가담 한 프랑스의 재정을 어렵게하고 또한 프랑스의 인권 선언에 영향을 주어 프랑스 혁명의 요인이 되었다.



2. 명예 혁명(1688년~1689년)


전투를 회피했고, 제임스 2세의 처형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혈 혁명이라고도 한다. 또한 46년 전 청교도 혁명과 함께 영국 혁명이라고도 한다.


청교도 혁명 때 프랑스로 망명 한 제임스 2세는,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귀국하여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제임스 2세는 카톨릭 정부에서 중용 개신교 성직자를 추방. 대다수가 개신교 인 의회는 그것에 불복, 네덜란드에 시집갔던 메리(제임스 2세의 장녀)와 남편 오라니에공 빌렘 3세를 영국의 왕으로 맞이하기 위해 쿠데타를 획책했다.


이 혁명으로 전제 군주제가 폐지되었고 왕권보다 우위에 있는 입헌 군주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영국 성공회(개신교)의 국교화가 설립 이후 잉글랜드 왕은 카톨릭을 금지.



1. 프랑스 혁명(1789년~1799년)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소(사회 계약론)와 볼테르 등 지식인들의 계몽 활동이 퍼지고 있었다. 계몽을 받은 사회의 본질적인 의의, 인간의 권리를 요구 한 귀족과 평민이 계급에 관계없이 일어섰다. 1789년 바스티유 습격을 계기로 소란은 프랑스 전역에 퍼졌다.


1791년 평민에게도 선거권을 인정하는 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국왕 루이 16세는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의 고향 오스트리아 일가에 망명을 도모하지만, 도중에 발각된 민중에게 감시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국왕의 권리를 유지하도록 요구, 1792년 프랑스 혁명 군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에 선전 포고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였다.


결국, 혁명은 건설보다는 파괴를 초래했다. 대혼란과 대학살 이후 그 혁명가들의 대열에서 독재와 나폴레옹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소요는 헛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1789년 혁명의 발발로부터 1815년 나폴레옹의 결정적인 실각까지 유럽과 이탈리아 역사에 진정한 교훈을 남김으로써, 혁면 전과 후의 명확한 구분을 짓는 시기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