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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최강부대 "테바이 신성대"는 동성애 커플로 구성

o2zone 2022. 3. 9. 08:53

오늘날까지, 수많은 정예 부대가 세계 각지의 전장에 태어났다가 사그라 들었다.

그 중에서, 한층 더 이채를 띠는 부대가 고대 그리스에 있었다는 것. 바로 도시국가 테바이의 신성대 "히에로스 로코스"이다. 히에로스 로코스는, 남성 동성애 커플 150쌍으로 편성된 "사랑의 300<쓰리핸드 레드>"로 당시, "그리스 최강의 보병부대"로 이름을 날렸었다.

그런데, 왜 동성애자들만의 부대를 만들었을까?

또 그들은 어떻게 활약했고, 어떻게 종말을 맞이했을까?

 


■ 신성대의 탄생 : "사랑의 힘"으로 전투력 업!

신성대 "히에로스 로코스"는, 기원전 378년에,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바이에서, 장군 골기다스에 의해 결성된 보병 부대이다. 편성은 위에 말한대로 남성 동성애 커플 150쌍, 총 300명으로 구성.

골기다스는, 사회 계급에 관계없이 전사로서의 기량과 평판의 높이를 중시하고, 300명의 졍예를 선발했다. 

동성애자를 전사로 선택한 이유는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에 있어서의 테바이가, 남성의 동성애가 가장 번성한 도시였다는 것이다. 테바이가 위치한 보이오티아 지방(그리스 중부)은, 소년애로 유명한 헤라클레스가 숭배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조카인 이올라우스를 종자이자 애인으로 삼아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테바이에서의 동성애는 드문 일도, 그 무엇도 아니었고, 극히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또 헤라클레스를 배워서인지, 테바이에는 나이차이가 많은 커플도 굉장히 많았던 것 같다.

다른 하나는, 커플로 편성함으로써 전투에 대한 사기를 올리기 위함.

각 커플은 전투 기술이 뛰어난 데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다. 게다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전쟁터에서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각오도 엄청났다는 것.

골기다스는 바로 "사랑의 힘"을 통한 전투력 향상을 상정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의 생활은 국비로 조달되어 평시에는 오로지 훈련에 힘썼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유수의 정예 부대가 탄생.

그렇다면, 실제로 그들은 어떤 활약을 했을까?

 

■ 레우크트라의 전쟁 : 최강 스파르타군을 무찌른 전설의 한판

기원전 371년, 테바이를 중심으로 한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당시 그리스 최강으로 꼽혔던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군과 일전을 벌이게되었다.

그 전장이 된 것이, 테바이 근교에 있는 "레우크트라"이다.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병력에서 크게 뒤져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구체적으로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중장보병 6000, 기병 600, 신성대 300, 총 6900명.

여기에 대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은 중장보병 9300, 기병 1000, 스파르타 전사 700 등 총 1만 1000명으로 거의 두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이 열세를 뒤집기 위해 취한 전략이 사선진이다.

아래 이미지....
파란색이 보이오티아 연합군, 빨간색이 펠로폰네소스 동맹군.

 


당시의 전법으로는 우익에 병력을 집중시키는 진형이 철칙이었고, 최강의 스파르타 군도 열의 오른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적진의 가장 강한 부분을 일거에 무너뜨리기 위해 철칙을 어기고, 좌익에 병력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적측이 12열 편성으로 쭉 늘어서 있었던 반면, 보이오티아 연합군은 좌익에 과감히 50열을 배치했다.

그리고 기병대와 함께, 그 선두에 선 것이 신성대 "히에로스 로코스"이다.



테니스 공에 볼링공을 부딪치는 것과 같은 형태로, 여기에는 역시 스파르타 군도 당황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병력을 왼쪽으로 집중시키는 만큼, 오른쪽은 허술하게 된다.

이 약점을 없애기 위해, 좌익을 선발로 하여 우익으로 가면서 조금 늦게 진군시켰다.

이것이 사선선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선진(록세 팰랭크스)"이라고 한다.

이렇게 강한 부분끼리 가장 먼저 맞붙게 되었는데, 그것은 백전연마의 스파르타군.

상대의 기습을 앞으로 재빨리 진형을 바꾸고, 50열의 중후한 대열을 협공으로 무너뜨릴 수 있도록 좌우로 분산했다. 그런데 이를 멈춘 것이 바로 선두에 있던 신성대였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진로를 완벽하게 망침으로써, 작전은 예정대로 수행되었고, 결국 최강 스파르타군을 무찌르는 쾌거를 이룩. 마침내 신성대는 명실상부한 그리스 최강의 부대가 된 것이다.

 


■ 신성대가 흩어진 날 : 적장의 마음도 움직인 최후의 싸움

이후 그리스 패권을 쥔 테바이는, 기원전 338년 북쪽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운명의 일전을 벌이게 된다.

이 무렵,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오랜 전란으로 피폐해졌고, 필리포스 2세(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이끄는 마케도니아의 표적이 되었다.

게다가 필리포스 2세는 젊은 시절, 3년간 테바이의 인질로 지내면서 신성대의 활약과 사선진의 전술을 생생히 목격했다. 그리고 그가 마케도니아의 왕좌에 오르자, 신성대를 모델로 삼아 군대를 강화시켰다.

사선진 전술을 도입할 뿐만 아니라, 창을 사리사(sarissa)라고 하는 리치가 긴 창으로 바꾸고, 게다가 검이나 갑옷, 투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무구를 개량했다.

테바이의 신성대를 훨씬 능가하는 최강의 군대가 탄생한 것이다.

기원전 338년 8월, 테바이와 아테나이 동맹군은 보이오티아 지방에서 마케도니아군을 맞이하였다.

이것이 "카이로네이아 전투"이다.

동맹군 병력이 신성대를 포함한 1만 보병과 600개 기병인데 비해 마케도니아군은 3만 보병과 3000개 기병으로 압도적 차이를 보였다.

또한, 마케도니아는 테바이 전술을 속속들이 꿰뚷고 있었고 사선진도 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동맹군은 속수무책으로 막강한 마케도니아군에게 박살이 나 버렸다.

그러나, 많은 보병들이 패주하는 가운데, 테바이의 신성대는 누구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를 떠난다는 선택은 없었겠지요....

결과, 신성대는 괴멸적인 데미지를 받았고 300명중, 무려 254명이 전사.

그 모습을 본 필리포스 2세는, 신성대의 사랑과 용기에 가슴깊이 감동하여, 그들의 시신을 앞에 두고 눈믈을 흘리며 찬양, 조의를 표했다고 한다.

신성대는 전쟁터에 묻혔고, 묘지 위에 "The Lion of Chaeronea"라고 불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세기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7열로 배치된 254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신성대의 유해임이 판명되었다.

이 전쟁 이후, 다시는 신성대가 결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과 용기 이야기는 역사의 위대한 한 장으로 사람들에게 계속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