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19세기의 도시를 휩쓴 스트리트 갱

o2zone 2017. 4. 8. 10:58

시골과 도시, 둘 중에서 대체적으로 도시 쪽이 치안이 나쁜 것이다.


시골은 서로 다들 아는 사이니까,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즉시 이름이 온 동네를 떠돌게되고 거기에 살수 없게되어 버린다. 그래서 치안은 의외로 좋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도시는 기본적으로 모르는 사람 밖에 없으니,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바로 자신에게 나타나는 어떠한 영향이 없다. 큰 죄가 아니고서는... 그래서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인간끼리의 충동이 발생하게 된다.


급속하게 도시화가 진행된 지역에 지방에서 대량으로 사람이 흘러들어 빈부 격차가 확대되고, 가난한 사람끼리 결속 상호 부조 조직이 완성되어 간다. 특히 가난한 젊은이는, 그 불만을 폭력의 형태로 해결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고, 예외도 있지만 스트리트 갱의 대부분은 대체로 지방 출신 또는 지방 출신 부모의 교육 수준이 낮은 가난한 젊은이 인 경우가 많은 것...




산업 혁명으로 급속히 도시화가 진행된 19세기는, 그런 스트리트 갱단이 기승을 부린 시대. 이번에는 꽤 미치광이면서도 당시의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렸던 갱단을 알아볼까 한다.


1. 하이 립 갱


리버풀을 휩쓴 소년 갱단 : 하이 립 갱은 1880년대 리버풀의 거리를 배회 한 빈민가 소년 갱단.


그 존재가 공개 된 것은 1884년 1월. 스페인 선원이 구타를 당하고 칼로 회를 뜬 것처럼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이 범인으로 17세의 소년이 검거. 그렇지만 소년들에 의한 린치 살인은 증가했다.


1884년 ~ 1886년 하이 립 갱의 피크기에 다수의 선원, 항만 노동자, 상점 점원이 살해 되었다. 그들은 무기로 무거운 벨트와 나이프를 가지고 길거리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 중 적당한 인물을 찾아 골목으로 데려가 린치를 가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그 방법으로 "코너 남자"라고 불리었고, 그 살인의 불합리 함, 빈민가 소년의 갈 곳없는 폭력은 리버풀 사람들을 떨게했다.


1886년을 기점으로 조직을 활동은 점점 둔화되었고, 90년대에는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2. 40명의 도적단


뉴욕에 눌러앉은 영세민의 절도단 : 뉴욕에는 수많은 스트리트 갱단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렇지만, 그 초기 1825년 이후 출현 한 것이 "40명의 도적단(Forty Thieves)"이다.


구성 멤버는 빈민가에 사는 아일랜드 이민자로, 그들은 처음 골목에서 싼 야채와 음식, 고기 등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지만, 한 때부터 소매치기와 타카리 강도 쪽이 훨씬 효율이 좋다는 것을 알고 점차 도당을 짜고 조직적으로 범죄 행위를 저지르게 되었다.


초기 지도자 인 에드워드 콜먼은 아내를 살해 한 혐의로 투옥되어 버리지만, 리더 부재 후에도 조직은 확대되어 나갔고, 슬램 빈민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하고, 소년만을 모집한 "40명의 도적단"이라는 유스 조직조차 있었다고 한다.


도적들은 범죄로 부를 축적하고, 일부는 민주당 도당 "Tammany Hall"에 거액의 헌금을 하고 정치 활동에까지 관여하는 사람도 출현했다고 한다.


3. 록스 푸시


후에 패션 브랜드가 된 시드니의 스트리트 갱 : 1870년대 호주 시드니에서 활동 한 스트리트 갱은 "PUSHES"라고 불리었다. PUSHES중에서 최대였던 것이 개신교 계열의 멤버로 구성된 "록스 푸시".


그 라이벌은 카톨릭 계의 PUSHES에서, 가장 큰 그룹은 래리 호레이라는 사람이 리더 인 "라리킨스"라는 그룹이었다.


1871년, 라이벌의 PUSHES 끼지 결판을 짓게되었고, 두목끼리 권투로 자웅을 겨루게 되었다.


래리 호레이는 캐나다 복서 밑에서 훈련을 쌓아 상당한 자신감이 있었지만, 록스 푸시 두목도 막상 막하로 강했고, 둘이 서로 양보없이 불꽃튀는 싸움을 벌여 71라운드나 이어갔고, 경찰이 말리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싸웠을 것이라고 할만큼 전설적인 투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싸움은 록스 푸시 두목이 좀 우세하였기 때문에, 이후 록스 푸시가 라리킨스를 컨트롤하게 되었고, 록스 푸시는 20년에 걸쳐 강간이나 살인 등을 저지른 시드니의 밤의 공포가 되었다.


20세기가 되자 록스 푸시는 활동을 중지. 그리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의 스트리트 갱 패션이 갑자기 부각되게되어 패션 브랜드 "The Rocks Push"가 탄생했다.


4. 바워리 보이즈(Bowery Boys)


뉴욕의 정치와 문화에 영향을 준 가혹한 갱 항쟁: 1840년대 뉴욕의 스트리트 갱 항쟁이 피크였던 시절.


뉴욕에 노동자 계급이 사는 바워리 지구를 거점으로 활동 한 스트리트 갱 "바워리 보이즈". 빈곤 백인층이 주를 이루었고, 반 카톨릭 반 아일랜드계를 내걸고, 배타주의적인 활동을 하고있었다. 회원은 평상시는 정육점과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자경단으로 소방단에 속하는 일종의 친위적인 사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중산모를 쓰고, 전통적인 WASP 문화와 자신들의 일을 이민자들로부터 지키려고 다른 그룹의 갱단과 항쟁을 벌였다. 바워리 보이즈의 리더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클 월시는 정치의 세계에 진출, 부유층에 맞서 빈곤 백인층의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었고, 부하를 동원해 압력을 걸기도 했다.


마이클 월시는 1895년에 사망하지만, 그 싸움은 시인 월트 화이트 맨에 의해 "친위적인 남자의 삶"처럼 그려져 뉴욕의 빈곤 백인층에서 영웅시되었다.


5. 죽음의 토끼 단


바워리 보이즈의 천적 갱단 : 바로 위에 언급 한 바워리 보이즈와 항쟁을 벌였던 스트리트 갱단, 아일랜드 이민자를 중심으로 구성 된 "죽음의 토끼단(The Dead Rabbits)".


이 별난 이름은, 단원이 선전 포고를 위해 적의 아지트에 죽은 토끼의 시체를 던졌던 것에 유래한다. 당시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속어로 죽은 토끼는 "투쟁을 시작하는 전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에는 모두 1,000명 이상의 구성원이 있었으며, 두 갱단이 직접 충돌 한 날은 없었고, 1857년 7월에 일어난 대규모 투쟁은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두 갱단을 합치면 5,000명 이상의 사람이 싸움에 참여했고, 8~100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집이나 빌딩, 마지막에는 고아원에까지 연방군이 출동해 폭동은 진압되었다고 한다.